ㆍ중독 없고 통증만 잡아줘… 전문가들 “치료효과 높지만 의존성 낮아”
성인인구의 10%가 앓고 있다는 만성통증. 퇴행성 질환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 노인인구가 증가할수록 그 비중이 늘어나고 있지만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고심해 왔다. 사실 치료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약성 진통제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데 전문가들은 이견이 없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의사도 환자도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꺼린다. 지난 5월 30일 대한마취통증의학회에서 1037명의 비마약성 진통제로 치료 실패한 만성통증 환자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한 임상결과가 발표되었는데 92.6%의 환자가 마약성 진통제 치료에 만족했다고 한다. 이 연구를 발표한 가톨릭의대 마취통증의학과 문동언 교수의 조언으로 만성통증에 마약성 진통제가 어떤 효과를 주는지 알아보았다.
통증은 고장난 경고등
통증은 인체의 경고등이다. 통증을 통해 우리는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게 된다. 칼에 베이거나 불에 델 때 우리는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몸이 더 심각하게 손상을 입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고등이 때때로 꺼지지 않아 문제가 된다. 나이가 들어 퇴행성 질환을 앓게 되면 이런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게 되는데,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없는 통증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만성통증이라고 한다. 대상포진, 관절염, 디스크, 골절 등 심하고 지속적인 통증을 보이는 질병이 흔한 원인이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알고 지내온 한국인의 정서 때문에 만성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은 꾀병을 부리는 것이거나 정신적으로 유약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원인’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의 실체가 밝혀졌다. 통증을 느끼는 뇌의 신경세포가 아주 작은 통증을 불필요하게 증폭시키거나 통증신호가 없는 데도 통증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은 암보다 커
현재 우리나라 만성통증 환자는 암·관절염·희귀질환 환자를 모두 포함해 성인 인구의 약 10%인 250만명 이상일 것으로 의료계는 추정하고 있다. 특히 고령 인구와 만성질환의 증가세로 인해 만성통증 환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또한 만성통증은 환자 개인의 고통에 그치지 않고 부양 문제, 의료비 지출 등으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만성통증으로 인해 지출된 비용은 약 2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것은 같은 시기 암(2400억원)보다 10배가량 큰 규모이며, 고혈압(2900억원)이나 뇌혈관 질환(6100억원)보다도 많다.
만성통증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적절한 통증치료가 잘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참아야 한다’는 문화적인 문제도 한몫하지만, 진통제 선택의 어려움이 주된 원인이다. 중등도 이상의 통증에 사용할 수 있는 진통제는 마약성 진통제와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가 주류를 이룬다.
대부분의 환자가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꺼리기 때문에 NSAIDs를 사용하게 되는데, 만성통증은 이미 중추신경에 변화가 발생한 질환이기 때문에 말초신경에만 작용하는 NSAIDs로는 치료효과가 제한적이다. 또한 위장장애 등 노인이 참기 힘든 부작용이 많고, 최근에는 장기복용 시 심장질환이나 순환기계의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고가 늘면서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만성통증 치료에 적합하지는 않다는 결론이 났다.
마약성 진통제는 NSAIDs에 비해 통증조절효과가 뛰어나고, 용량을 증가시키는 만큼 진통효과도 늘어나 극심한 통증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혹시나 중독은 되지 않을까?’ ‘평생 끊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처방을 주저하게 만든다.
중독가능성 매우 낮아
그러나 만성통증 환자들의 경우 뇌의 마약수용체가 현저히 줄어 있고, 강한 쾌락을 느끼게 되는 신경반응체계의 일부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마약성 진통제의 위험 자체가 매우 적다. 중독이란 환각이나 쾌락경험을 하고 이런 쾌락을 목적으로 약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방형 제형 심지어 며칠씩 효과가 지속되는 패취제 형태의 마약성 진통제가 만성통증 치료에 사용되면서 혈중농도가 급격히 올라가지 않아 쾌락을 경험할 수 없고, 24시간 통증을 막아주기 때문에 통증에 대한 두려움으로 약을 탐색하는 일도 없어졌다. 지난 2008년 미국 통증학회에서 존스 홉킨스병원 라자(Srinivasa Raja) 교수는 단지 3% 미만의 환자에게서만 약물 의존성이나 중독이 나타난다는 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동언 교수는 ‘알코올 중독 등의 약물남용 경력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안심하고 써도 될 정도로 중독의 가능성은 미약하다’고 말한다.
마약이라는 이름도 선입견에 한몫한다. 마약(痲藥))이라는 이름은 마취(痲醉)작용이 있는 약(藥))이라는 한자에서 유래했지만 마법사, 악마의 약이라는 마약(魔藥)으로 오인되고 있다. 한 번 사용하면 평생 사용해야 하며, 결국 중독으로 이끄는 악마의 약이라는 선입견이 필요한 환자의 약에 대한 접근을 막고 있는 것이다.
실제 환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국에서 척추 질환으로 유발된 만성통증환자 103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듀로제식 디트랜스(Fentanyl 성분의 서방형 패취제) 임상 결과 NSAIDs 등 기존 치료에 실패한 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통증강도가 49% 감소하는 뛰어난 효과를 보였다. 치료 실패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상이었지만 이들 중 효과를 얻지 못한 환자는 단지 3.3%에 불과했다.
이뿐만 아니라 환자의 92.6%가 임상 경험 후 마약성 진통제가 기존치료보다 좋다고 했고, 84.4%가 임상이 끝난 뒤에도 듀로제식 디트랜스를 투여받았다. 문 교수는 “효과를 느낀 대부분의 환자(92.6%)가 마약성 진통제를 계속 사용하길 원했다는 것은 만성통증에 있어서 마약성 진통제가 매우 효과적인 치료법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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